강 선생은 고참 국어과 교사였다. 언제나 미소 띤 시골스러운 얼굴로 타인을 대하며 상대를 해칠 의사가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던 그는 사실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대화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의 역설을 기가 막히게 활용할 줄 알았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쾌감은 그가 얘기 들어 줄 상대의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일방통행 연설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소재로 시작하여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점을 들춰내고 요청하지 않은 조언으로 끝맺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쉬어빠진 음색,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한 인맥, 무불통지에 무소불위 오지랖 넓은 잡지식, 어색함을 덮으려는 더 어색한 미소, 반경 1미터까지 쏘아대는 로얄젤리 타액은 무대장치일 뿐이었고, 역시나 화룡점정은 아무리 들어도 친근감이 생기지 않던 거친 사투리였다. 그와 단 한 번도 대화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두 번 이상 대화에 응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퇴임식 날 더 이상 그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정과 성을 다하여 있는 힘껏 손뼉을 쳐주었다. 우리 대부분은 크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배운 대로 행하면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이든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궁금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기 정체뿐 아니라 내 생각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이라거나, 자기 팔다리에 이질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고 육신은 나날이 썩어간다고 믿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정체성과 자아 확립 사이의 혼란을 겪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우리는 보통 기본적인 자아의식을 잘 지켜낸다. 또 한편으로는 알츠하이머병으로 뇌 손상을 입고 자신을 거의 잃어버리는 경우처럼 우리의 자아 감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하기도 한다. 우리 뇌의 많은 부분은 자신이 온전히 자신일 수 있도록 서로 돕지만, 매우 사소한 손상이나 무해한 오작동으로도 완전히 균형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부류의 ‘비범한’ 인간 자아 여덟 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장.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나는 누구인가? 우리 대부분은 자아, 즉 주체인 ‘나’를 변함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몸과 마음에 애착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몸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아감은 우리 뇌가 공들여 일한 결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뇌가 적절한 자아 감각을 제공하
1961년 박정희가 주도했던 5.16 군사 반란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쿠데타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의 유신은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과 황도파 젊은 장교들이 주도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쇼와 유신’의 한국판 재탕이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고 일본 국민을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 박정희의 유신도 똑같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의사가 아닌 최후의 유신 지사(志士) 김재규였다. 10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헌정 중단 사태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하며 일본 천황처럼 초법적 존재가 된 것을 말한다. 그는 유신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며 포장했으나 5·16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명분처럼 정권을 민간에 이양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YH 무역 사건과 김영삼 제명 파동이 터지고, 부마 민주항쟁도 일어나면서 유신 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실 탄생과 몰락의 궤를 함께 하는 유신의 특성상 박정희 정권의 종말은 거의 정해진 것이 아닌가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외국에 여행을 가든, 한국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을 만나든, 영어밖에 모르는 비영어권 사람을 대하든, 누구나 영어 한두 마디쯤 하며 살아가는 시대다. 그러나 당위성이 보편성을 이기지는 못한다. 누구나 해야 하지만 누구든 다 잘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게 영어이기도 하다. 이제는 전반적인 영어 사용 인구가 늘어나고 생존에서 생활로 사용 범위가 상향되면서 다양한 학습 욕구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여행지에서 사려는 물건의 값은 얼마인지, 당장 급한 화장실은 어디인지,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밝히는 등 생존에 필요한 영어를 배우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논리적으로 구조가 잘 잡힌 회화를 해야 하거나 그보다 더 어려운 글로 표현해야 하는 작문 능력을 요구받는다. 이럴 때 가장 핵심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동사+전치사 또는 부사가 결합된 구동사(Phrasal Verb) 표현이다. 전치사는 자동사와, 부사는 타동사와 결합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어쨌든 본래의 동사 의미보다 훨씬 세분되어 쓰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컨대 동사 look에 전치사를 붙이면 본래의 의미 ‘보다’에서 깔보다(~down on), 돌보다(
하나의 작은 우주라 불리는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각기 다른 깊이와 느낌으로 인생을 배웁니다. 대개 나이와는 관계없이 그 정도의 차이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 김민식 PD와 나이는 비슷한 50대이지만 삶의 궤적은 비슷한 듯 사뭇 다름을 발견합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만은 않고, 학교에서 당한 괴롭힘을 하소연도 못 하고 끝내 참아내야만 했던 점도 비슷합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어 벌써 다섯 권이나 책을 펴낸 작가이면서도 사실 책이 좋아서가 아니라 친구가 없어 책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은 가슴 뭉클합니다. 『살아가면서 문득 돌아볼 수 있는 날들이 중요합니다. 어느 길에서 이름을 불러주고 내팽개친 꿈을 붙들어 주고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내 편이 되어준 사람에 대한 기억. 그 순간에는 몰랐을 테지만 그런 날들은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하죠. (51쪽)』 책 제목이 <외로움 수업>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외로움을 관리하는 정부 부서를 둘 정도로 외로움은 일찍이 인류가 겪지 못했던 질병의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저자의 어릴 적 아픈 추억과 어른이 된 이후에 겪는 쓰라
내가 사는 곳의 환경을 둘러보면 자연물보다 인공물이 훨씬 더 많다.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자연물이라 해봤자 정원의 흙과 나무가 고작이다. 극단적인 예로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 화장장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이 또한 인공물이다.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 화학제품은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화학제품이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화학제품을 사용해서 얻는 편리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 편리함에 취해 스스로 환경을 해쳐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쓰레기 섬이 등장하고 지하수와 모유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고 기상 이변에서 기상 위기로 격상된 요즘에서야 후손에게 물려 줄 지구환경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과연 화학제품을 포기할 수 있는가? 너무 늦어 포기할 수 없다면 대안은 있는 걸까? 저자의 간명한 논지는 서문에서 잘 밝혀놓았다. 지구환경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화학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지구 생태계를 둘러싼 화학물질의 정체를 파악하고, 가장 유력한 해법은 물질 순환 회복에 있음을 알리며, 이를 실천에 옮기려면 지구 생태계 작동의 원리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환경오염의 주범은
1988년 5월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한참 훈련받던 어느 날, 새벽 3시쯤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복통에 잠이 깨어 고통을 호소하자 조교들은 나를 의무실로 옮겨주었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 잠이 덜 깬 시큰둥한 표정의 의무병이 약을 건네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토끼 똥처럼 까맣고 동글동글한 환약 대여섯 알을 삼켰다. 이제 곧 나아질 테니 눈을 좀 붙여두라는 말을 뒤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복통은 씻은 듯 사라졌다. 사실 그 명약의 정체는 의무병들이 만병통치약이라 부르던 ‘소화제’였다. 순간,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셨을 때의 느낌을 상상해 보았다. “마음은 제자리에 머무르며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 존 밀턴, 『실낙원Paradise Lost』 1970년대 후반 라오스에서 이주해온 수십 명의 건강해 보이는 허몽 족 청년들이 수면 중 연달아 사망하기 시작하자 미국 의료 당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현상을 ‘원인불명 야면 돌연사 증후군’이라 불렀는데, 조사 결과 놀랍게도 사망 원인은 그들의 전통 주술(呪術)이었다. 밤이면 돌아다니는 사악한 악령 다초(dab tsog)가 희생자의 가슴
지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이거나 혐오의 대상일 수도 있는 ‘백치’라는 단어와 그들을 잔인하게 고립시켜온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일부 독자들은 불쾌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가 이 용어의 사회적 함의와 유사어 및 진화해오는 과정, 그리고 지난 3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찾아내어 독자들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백치’라고 불린 사람들에게 가해진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잔인함뿐만 아니라 그저 정상적이지 않으니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격리 감금시켜 사회적으로 매장했던 폭력까지 들추어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독자에게 묻고 있지만, 제대로 균형 잡힌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정신적 장애에 대해 ‘비장애인’들이 가졌던 기괴한 편견과 이로 인한 결과를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미쳤던 파괴적 영향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지는 사회가 그들을 능력주의의 굴레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는 순수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연구를 통해 지적 정신적 장애인들이 소외되어온 역사를 널리 알리고 바로잡아야 한
영어를 학습할 때 소리를 듣고 이해하는 청해(聽解)는 학습자의 영어 이해력과 발음 능력을 향상하는 좋은 방법이다. 영어교육 전공자로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학습자에게 외국어로서의 영어 듣기 능력 향상을 위해 다음과 같이 감히 조언해 본다. 첫째, 자신의 수준에 맞는 듣기 자료 또는 교재를 찾는다. 여기서 말하는 ’수준‘은 학습자의 독해력에서 거의 결정된다. 읽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무작정 듣는다면 이만한 자기 학대가 따로 없다. 만약 교재가 너무 어렵다면 쉽게 좌절하고 의욕을 잃을 수 있으며, 반대로 너무 쉽다면 학습의 진전을 이룰 만큼 충분한 자극을 얻을 수 없고 보다 높은 단계에 도전해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둘째, 문맥(context)에 주의를 기울인다. 학습자에게 익숙한 주제의 대화나 강의의 맥락을 이해하면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맥을 빨리 이해하는 데에는 해당 분야의 배경지식이 큰 역할을 하므로 평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자주 접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중요한 내용이나 자주 쓰이는 표현(fixed/frozen phrase)을 들을 때마다 적어 둔다. 소위 굳어진 표현은 빠른 소통에 매우 편리하다. 핵심 사항을 적
아마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테지만 원로 코미디언 전유성 씨가 했던 유명한(?) 말을 떠올려 본다. 잠깐의 굴욕을 참으면 인생이 행복하다. 굴욕은 본래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을 뜻하는데 최근에 와서는 그 의미가 옅어져 ’창피하다‘와 거의 비슷하게 쓰이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무언가 창피함을 느낀다면, 이는 미래가 보내는 성공의 신호라고 말하는 저자 나카가와 료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 유명 카피라이터 겸 광고 기획자로 변모한 자신의 인생 경험을 공유한다. 고민되는 일을 만날 때마다 창피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는 그는 창피함을 ’꼴사나운 일‘도 할 수 있는 용기인 동시에 소리 없이 기회를 빼앗는 괴물이라는 양면성을 지적한다. 창피함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태를 뜻하기 때문에 창의성의 다른 말로도 표현되며 몇 살을 먹든 창피를 무릅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100세는 살게 되기 때문에 한 가지 직업과 기술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시대이며, 해본 적 없는 일에도 도전해야만 하는 상황이 늘어나리라 전망한다. 감정의 동물인 사람이 그런 난감한 상황을 만났을 때 ’창피함‘을 외면하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