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파크 시니어에게는 그 못지않은 재능을 가진 동생 뭉고 파크(Mungo Park, 1836년 ~ 1904년)가 있었다. 뭉고는 형과 함께 머셀버러에서 골프를 시작했지만, 젊은 시절 선원으로 20여 년간 바다를 누비는 삶을 선택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해상 무역이 활발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선원이 되곤 했다. 뭉고 역시 모험을 선택했고, 그의 인생은 바다 위에서 수많은 폭풍우와 파도를 겪으며 다져졌다. 거친 바다 생활은 그에게 남다른 강인한 정신력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길러주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늘 골프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긴 항해 생활을 마친 후 1874년, 고향 머셀버러로 돌아온 뭉고는 다시 골프 클럽을 잡았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 이미 쟁쟁한 젊은 선수들이 골프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잊었거나, 해맑게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그의 실력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1874년 머셀버러에서 열린 디 오픈 챔피언십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무려 우승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의 우승은 모든 골프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디 오픈은 세인트앤드루
1860년 윌리 파크 시니어의 이름이 골프 역사에 영원히 각인된다. 그가 '골프의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와의 치열한 라이벌 구도 속에서 제1회 디 오픈 챔피언십의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골프계는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챌린지 매치(Challenge Match)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매치들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라, 한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거대한 드라마였다. 파크 가문의 홈 코스인 머셀버러와 모리스 가문의 세인트 앤드류스를 오가며 펼쳐진 이 매치들은 당대 최고의 흥행 카드였으며, '도박'이라는 흥미로운 요소와 함께 수많은 관중을 몰고 다니며 골프를 소수의 귀족 스포츠에서 대중적인 관람 스포츠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대결은 단순한 기량 경쟁을 넘어, 플레이 스타일과 골프 철학의 충돌이었다. 파크는 모리스보다 훨씬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는 장거리 드라이브와 과감한 퍼팅을 즐겨했고, 이는 안정적이고 정교한 플레이를 선호했던 모리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팬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했다. 1860년 10월 17일, 프레스트윅에서 열린 제1회 디 오픈 챔피언십은 골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
윌리 파크 시니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윌리 파크 주니어와 멍고 파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22일부터 이틀간 미국 플로리다주 리츠-칼튼 골프클럽(파72)에서 열리는 PGA 투어 비공식 이벤트인 PNC 챔피업십에는 이들 파크 패밀리를 기억해야 한다. 1860년 처음 열린 디 오픈 초대 챔피언은 20대의 라이징 스타 윌리 파크 시니어(1833-1903)였다. 초기 챔피언들이 그렇듯이 윌리 파크 시니어도 캐디로 골프를 시작했고, 디 오픈 1회 대회에 당시 가장 유명한 올드 톰 모리스를 2타차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초창기 골프 대회의 우승자는 파크 가문과 모리스 가문이 차지했다. 1860년 윌리 파크 시니어 (1) 1861년 올드 톰 모리스 (1) 1862년 올드 톰 모리스 (2) 1863년 윌리 파크 시니어 (2) 1864년 올드 톰 모리스 (3) 1865년 앤드류 스트래쓰 1866년 윌리 파크 시니어 (3) 1867년 올드 톰 모리스 (4) 1868년 영 톰 모리스 (1) 1869년 영 톰 모리스 (2) 1870년 영 톰 모리스 (3) 1871년 연속 3회 우승으로 챔피언 벨트를 영 톰 모리스가 가져감으로 인해 대회 최소 187
윌리 파크 시니어(Willie Park Sr., 1833년 6월 30일 ~ 1903년 7월 25일)는 스코틀랜드 이스트 로디언의 월리포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이자 정원사였으며,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지만, 시골 마을의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어린 윌리는 정규 교육이나 체계적인 골프 훈련을 받기 어려운 가난한 환경에서 골프와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는 머셀버러의 링크스에서 캐디로 일하며 독학으로 골프를 익혔다. 머셀버러는 세인트앤드류스만큼 유명한 골프의 성지는 아니었지만, 1567년 메리 여왕이 골프를 친 기록이 남아 있고, 1672년 머셀버러 올드 코스가 만들어져서 가장 오래된 골프 코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754년에 문을 연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가장 오랜된 골프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머셀버러에는 수많은 아마추어와 프로 골퍼들이 모여드는 활기찬 곳이었다. 윌리는 이곳에서 매일 골프를 보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고, 선수들의 스윙을 흉내 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그의 특별한 재능은 머셀버러의 '베이커스 홀스(Bakers’
골프의 역사는 수많은 전설과 그들을 둘러싼 드라마로 가득하다. 19세기 중반, 골프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던 격동의 시기,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거대한 골프 가문이 존재했다. 한쪽은 '골프의 성지'로 불리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굳건히 전통을 수호하던 '모리스 가문'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한 머셀버러의 '파크 가문'이었다. 이번 연재는 바로 이 파크 가문의 위대한 역사를 조명하며, 초대 디 오픈 챔피언이라는 빛나는 타이틀을 거머쥔 윌리 파크 시니어(Willie Park Sr.)를 필두로, 그의 동생 뭉고 파크(Mungo Park), 그리고 아들 윌리 파크 주니어(Willie Park Jr.)가 어떻게 골프의 초기 역사를 주도하고 모리스 가문과 치열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골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시켜 왔는지를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적 현상이었다. 세인트앤드류스 로얄 앤 앤션트 골프 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은 세계 최초라는 권위 아래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본 기사는 본사와 제휴한 조세금융신문과 동일하게 게재한다. 라이벌 윌리 파크 시니어 1859년 스코틀랜드 골프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챔피언 골퍼 앨런이 영면에 들어간 것이다. 앨런은 세인트 앤드류스의 최고 골퍼이자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프로 골퍼, 최초의 챔피언 골퍼였다. 44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앨런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스승이자 최고의 골프 파트너였던 앨런의 장례식에서 참석해서 직접 운구를 한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스코틀랜드 골프계는 그의 타이틀인 챔피언 골퍼를 이어받을 골퍼를 뽑게 되고, 제임스 오길비 페어리를 주축으로 디 오픈 챔피언쉽이 조직된다. 바로 디 오픈의 시작이다. ‘존경할 만한 캐디(respectable caddie)’로 알려진 프로 골프 8명이 영국과 스코틀랜드 골프 클럽을 대표해서 초청되었고, 우승자에게는 챔피언 벨트(Challenge Belt)가 수여되고, 3회 연속 우승자는 우승 벨트를 영구 소장할 수 있도록 했으며, 12홀 프레스트윅 골프 클럽에서 3라운드 경쟁을 통해서 우승자를 뽑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최초의 디 오픈은 압도적으로 톰에게 유리한 경기였다. 그가 만든 코스 그리고 지난 10년간 관리해온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