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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김대중의 골프히스토리] 골프의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

올드 톰 모리스 덕분에 우리는 골프를 즐길 수 있다.

  ※본 기사는 본사와 제휴한 조세금융신문과 동일하게 게재한다.  

 

 

1744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골프 룰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첫 번째 규칙은 ‘반드시 홀에서 한 클럽 이내에 플레이어의 볼을 티해야 한다(You must tee your ball, within a club’s length of the hole)’이다. 이 말을 현대적 의미로 쉽게 표현하자면, ‘그린 위 홀 컵을 중심으로 한 클럽 이내에 티를 만들고 그 위에 볼을 놓고 쳐야 한다’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이 현대 규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린은 퍼팅을 해야 하는 곳인데, 퍼팅을 해야 하는 그린 위에 티잉을 해야 한다? “이건 뭐 소인국 골프 룰인가? 그린에서 1클럽 이내에서 티 샷을 하고 바로 그린에서 퍼팅? 뭔 소리인지?”

 

백 투 더 패스트!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홀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구멍이라는 말이고, ‘땡그렁’ 소리가 나는 홀 컵1)은 없었다. 지금처럼 티잉 구역 자체가 없고, 그린 위에 티를 만들어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첫 번째 조항 해석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2)

 

19세기에는 티를 하기 위해서는 [그림1]처럼 캐디가 모래에 물을 적신 후에 모래를 손으로 주물러서 볼을 올려 놓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림2]에 보이는 것처럼 땅 위에 볼을 올리기 좋게 모양을 만들어서 모래를 놓으면 플레이어가 모래 위에 올려져 있는 볼을 쳐서 플레이 했다. 젖은 모래를 조그마한 언덕처럼 만들어서 볼을 치기 쉽게 만드는 것을 티라고 불렀다.

 

 

 

[그림2]는 영화 ‘토미의 영광(Tommy’s honour)’에서 나오는 장면을 캡쳐한 것으로 사진의 좌측에 서 있는 인물이 올드 톰 모리스(이하 ‘톰’이라 씀)이고, 어드레스 중인 인물이 그의 아들 영 톰 모리스(이하 ‘토미’라고 씀)다.

 

톰이 태어나서 활약하던 그 당시 골프는 지금의 골프와 너무 많이 달랐다.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골프, 치기 너무 어려운 골프, 장비가 너무 비싼 골프였다. 그를 현대 골프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부터 간단하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정식 이름은 토마스 미첼 모리스(Thomas Mitchell Morris), 그의 아들(다음에 연재할 예정임)과 구분해서 올드 톰 모리스(Old Tom Morris) 또는 톰 모리스 시니어(Tom Morris Sr.)라고 부른다. 이 두 부자를 현대 골프의 창시자, 현대 골프의 개척자, 현대 골프의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칭한다.

 

죽음과 너무 가까웠던 그의 삶

 

톰은 1821년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0살 때 와인 병에 사용되던 코르크 마개를 연결해서 골프 볼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놀았다고 한다. 14살(1835년)에 그의 영원한 스승이자 친구인 앨런이 운영하던 공방에 제자로 들어가서 캐디 업무를 배우고, 패더리 볼 만들기를 배우고, 골프 클럽 만드는 법을 배웠다. 심지어 골프까지 앨런에게 직접 배우게 된다.

 

그는 입사 4년(1839년)만에 앨런에게 인정받아 초고속으로 한 단계 진급한 숙련공이 되어 다시 5년(1844년)간 앨런 밑에서 중간 관리자로 근무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챔피언 골퍼인 그의 스승 앨런의 최고 전성기를 1843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859년까지로 보는데, 1840년대 초부터 앨런이 골프 도전을 받으면 앨런의 영광스러운 지명을 받아서 파트너로 챌린지 매치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골프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톰은 20대 초부터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앨런 다음으로 잘 치는 골퍼로 인정받게 된다.

 

앨런과 톰의 영원할 것 같던 굳건한 관계는 기술의 발전으로 찾아온 새로운 골프 볼인 구타 페르차가 등장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끝을 달리게 된다.

 

당시 최고의 골퍼였고, 페더리 장인이었던 앨런의 입장에서 보면, 구타 페르차는 새로운 도전 세력이자 없어져야 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그렇게 아끼고 키워주웠던 톰이 구타 페르차 볼로 경기했다. 이는 앨런이 보기에는 배신이었고, 톰을 쫓아 버려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앨런에게 있어서 톰은 14살부터 가르쳐 왔던 제자이자 가족이었지만, 비즈니스 앞에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이단아가 된 것이다. 결국 톰이 구타 볼을 사용한 이상 앨런은 그와 같이 할 수 없게 된다.

 

반면, 톰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억울하다. 자의로 구타 볼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가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으로부터 1848년 쫓겨나는 그의 심정, 그가 나고 자란 그리고 한번도 떠나 본 적이 없었던 세인트 앤드류스를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후에 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앨런은 처음부터 새로운 볼(구타 페르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구타 볼은 굉장히 빨리 유행이 되고 있었는데, 페더리 볼 권위자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어요. 어느 날 미스터 캠벨(Campbell)과 골프를 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준비한 페더리 볼이 다 떨어졌어요, 다 알다시피 이 시절에는 볼을 잃어버리기가 너무 쉬웠죠! 미스터 캠벨이 친절하게도 구타 볼을 나에게 줬고, 그 볼을 내가 쳤죠. 그때 앨런이 왔는데, 누군가가 앨런에게 내가 구타 볼로 플레이했다는 사실을 고자질했고, 그 후로 우리는 갈라졌어요.”

 

이 글에 보듯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스승과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톰은 그의 스승인 앨런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스승의 처사에 대한 억울함도 그의 글에 나타난다. 그의 10대와 20대를 온통 감싸안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앨런이기 때문이다.

 

톰은 1848년 그의 나이 27살에 실업자가 된다. 1848년 앨런에게 해고당한 그는 3년이 지난 후(1851년)에야 새로 개장한 프레스트윅 골프 클럽(Prestwick Golf Club)으로 옮기게 된다. 골프의 고향인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아무 것도 없는 프레스트윅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골프장에 그린 관리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에게 무명의 3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절망 속에 희망이 새롭게 싹트듯이 그 와중에 그의 우수한 골프 유전자를 물려받은 토미가 태어났고, 그는 프레스트윅에서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를 만들어 간다.

 

프레스트윅에서 그는 페더리 볼 대신에 새로운 구타 페르차 볼을 만들었으며, 프레스트윅의 오리지널 3799야드의 골프 코스를 디자인하고 만들었으며, 코스 관리 책임자로서 그린 키퍼 역할을 했다. 물론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2인자 역할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1인자로서 골프 레슨도 했으며, 이벤트 대회도 개최했다. 물론, 클럽 메이커로서 역할도 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톰이 만들던 클럽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톰이 가지고 있던 6개의 클럽과 당시 시대상에 나타난 클럽을 비교해서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3)

 

[그림3]은 디 오픈 홈페이지에서 설명한 19세기 골프 클럽에 대한 설명이고, [그림4]는 또 다른 19세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클럽에 대한 설명이다. 소설 ‘토미의 영광’에 등장하는 톰이 가지고 있던 6개 클럽은 드라이버, 스푼, 두 개의 니블릭, 러트 아이언 그리고 나무로 만든 퍼터로 숫자로 보나 사용 용도나 보나 매우 비슷하다.

 

여기서 말하는 스푼은 우드 3번을 말하며, 그림3과 4에 등장하는 브레이지(Brassie)는 우드 2번을 말한다. 미드 아이언(Mid Iron)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아이언 2번, 매쉬(Mashie)는 아이언 5번, 매쉬 니블릭(Mashie Niblick)은 아이언 7번, 니블릭(Niblick)은 아이언 9번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하다.

 

 

 

1859년 그의 영원한 스승이자 스코틀랜드 챔피언 골퍼 앨런이 이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 톰은 그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잊고, 앨런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승이자 친구의 마지막 운구를 직접 한다. 앨런이 죽은 후 5년 뒤, 1864년 톰은 로얄 앤 앤션트 골프 클럽(Royal & Ancient Golf Club)의 공식 요청으로 그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그는 총괄 책임자인 그린 키퍼 그리고 골프 프로로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당시 세인트 앤드류스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의 첫 임무는 과거 세인트 앤드류스의 영광을 재현하고 세계 최초로 골프 코스를 확립한 골프장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좁은 페어웨이와 그린을 넓히는 동시에 새로운 그린을 만들었으며, 프레스트윅에서 해왔던 노하우를 적용해서 새로운 그린 관리 기술을 적용했다. 그 후 39년간(1903년까지) 세인트 앤드류스의 책임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4남 1녀를 낳았다.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4년 만에 세상을 등졌고, 톰의 나이 30살(1851년)에 골프계에 영원히 살아있는 전설의 토미를 낳는다. 토미는 디 오픈 최연소 우승, 최초로 4회 연속 우승으로 그 상시 슈퍼스타로 군림했고, 23살에 부모가 반대하는 여인과 결혼한 후 그 이듬해, 24살(1875년)에 그의 아내와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먼저 보내고 불과 세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해에 그의 아내 아그네스 베인도 그의 곁을 떠났다.

 

1889년에 그의 누이 둘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1893년 그의 넷째 아들 존이 34살에 세상을 떠났고, 1898년 그의 딸 엘리자베스가 46살에, 1906년 그의 셋째 아들 제임스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친족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나이 86세가 되는 해인 1908년 골프장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고,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었던 그의 아들 토미를 어린 나이에 떠나 보냈지만 좌절하지 않고 지금도 골프 역사 속에 위대한 존재로 남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있었을까?

 

[그림5]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 장면으로 토미가 디 오픈 3회 우승을 한 후 챔피언 벨트를 메고 아버지 톰과 함께 기념 촬영하는 모습이다. 톰의 근엄하지만 자랑스러워하는 모습과 토미의 여유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행복한 장면 뒤에 찾아올 불행을 톰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던 모든 이들을 먼저 보내고 그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각주

1) 이를 틴 컵(Tin cup), 주석으로 만든 컵을 말하며, 1996년 케빈 코스터너가 주연한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2) 과거에는 티잉 구역(Teeing Area)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땅 위에 티를 한다고 해서 티잉 그라운드(Teeing Ground)라고 불렀다. 2019년에 티잉 그라운드가 티잉 구역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필자도 골프 역사를 찾아보기 전에는 규칙 1번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정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3) 소설 ‘Tommy’s Honour’ 중에서

 

프로필 사진
김대중 기자

포씨유신문 발행인겸 편집인
글로벌캐디원격평생교육원 원장
전, (주)골프앤 대표이사
건국대학교 국제무역학과 박사과정 수료
일본 국립 쓰쿠바대학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저서: 캐디학개론, 캐디가 알아야 할 모든 것, 골프 이 정도는 알고 치자, 인터넷 마케팅 길라잡이, 인터넷 창업 길라잡이, 인터넷 무역 길라잡이, 인터넷 무역 실무, 386세대의 인터넷 막판 뒤집기, 386세대여 인터넷으로 몸 값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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