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상경한 듯, 주머니에 단돈 10만 원뿐인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강남 버스터미널에서 전화로 택배 일자리를 얻는다. 그가 맡게 된 택배 구역의 동네 이름을 따 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된다.
- 사실 이 바닥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죠.
- 바닥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죠. (16p)
택배기사를 구인하던 택배업체 사장 바나나 형님과의 첫 통화를 보면 그는 몸을 써서 살아가는 삶의 바닥까지 내려온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건사할 만한 능력과 생각을 지닌 그로서는 적어도 정신세계만큼은 아직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70p)
비 오는 날 배송 물품의 포장이 물에 젖었다며 안 받겠다고 갑질하는 옷가게 사장을 그는 이런 생각으로 바라본다. 갑과 을을 지나 병이 정을 하대하는 환경에서도 그는 스스로 돼지와 동급이 되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작품이 점점 흥미롭게 다가온다.
- 하지만 감정노동에 대한 대가 따위는 없다. 이런 걸 착취라 하고, 눈 뜨고 당하고 있는 걸 바보라고 한다. 가난하게는 살 순 있어도 바보로 사는 건 싫다. (75p)
배송한 물품을 창고 안쪽으로 옮겨달라며 갑질하는 다단계 회사 안내 여직원에게 배송과 운송의 차이점을 참교육하는 장면에서, 자존심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듯한 매력을 발산한다. 우리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접어두고 퇴근해 집에 와서야 겨우 꺼내 확인해보는 그 자존심 말이다.
-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야성의 제거에요. 노예에게 야성이 있으면 다루기 힘드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와 마찬가지죠. 먹이를 주고 쥐꼬리만 한 안정감을 쥐여주면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부려 먹을 수 있죠. 교육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경쟁을 시키고 서열을 주면 알아서 서로를 증오하며 끌어내리고 밟고 올라서기 바쁘죠. 그러면서 태연한 얼굴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건 자유라고 말하죠. 자유가 어떤 건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223p)
한 달간 택배 업무를 대신 뛰어준 보답으로 술을 사는 남현동과의 대화를 통해, 약자를 밟고 올라서야 약자 취급을 받지 않는 학습된 권력 구조의 모순과 이에 순응하도록 의도된 제도권 교육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들추고 있다. 경쟁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이리 명쾌하게 상기시킬 수 있다니.
- 되도록 사람과 연은 맺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이 맺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편해지는 성격이다. 이상한 데 결벽증이 있고 역시 다른 성격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84p)
-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 그럴 땐 포기하면 편하죠. 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요. 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 (189p)
- 사람이란 한계치에 다다르면 나뭇잎 한 장이 얹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법이다. 한계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죽는 것보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타인이 그 무게를 어찌 알겠는가? 설령 부부라고 해도 말이다. (204p)
이 부분은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독백으로 뽑았다. 인연은 물론 부부와 같은 최소 가족 단위에도 기름기 뺀 미니멀리즘적 태도를 보인다. 특수한 상황에 이르는 인간의 한계치를 경험해 본 이력을 엿볼 수 있으며, 어떠한 대인관계도 언급되지 않는 데 대한 우회적인 설명으로 읽힌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작품에 영향을 준 소설, 영화, 미드, 팝에 대한 오마주를 표방하였음을 밝히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말자는 인생관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어디 그런가?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경우는 물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인데 마주해야 하는 상황도 부지기수다.
한 번 만날 때마다 백만 원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자고 제안하던 억만장자 회장님의 손녀인 춘자, 수학 천재였지만 동네 바보가 되어버린 마이클과 경제철학 강의를 고집하는 그의 할아버지, 세상의 소리를 감상할 수 있어 좋다며 폐지를 줍는 마스크, 도박 중독으로 택배기사들 월급을 들고 달아난 바나나 형님, 동료 기사인 아파트와 청림, 술만 마셨다 하면 사고 치는 주창이와 시비 거는데 도가 튼 조 따거, 게이 바 코카인의 마약 유통업자인 제니, 관악 경찰서 강력3계 형사인 유도 등이 그러한 인간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침입자들’인가 생각해 보았다.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단지 생계를 위해 택배기사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행운동은 택배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인간 군상들과 어쩔 수 없이 엮여야만 한다. 본인이 선택할 여지도 없이 그는 주변인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배송 물품의 수화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 속으로 먼저 '침입'해야 한다. 그를 맞이하는 주변 인물들 역시 행운동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게 된다. 저자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는 침입자들의 세계에서는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의 예의와 불친절하지 않은 선에서의 친절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 행운동은 타인에게 무례하지도 않지만 무례한 일을 당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물질과 권위 등 타인과의 관계에 쉽사리 영향을 받아 자신의 본 모습을 기만하거나 잊어버리는 굴욕감을 맛보아야 하는 데 반해, 그는 마약밀매 조직에 납치를 당해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무척 당당하고 초연한 농담으로 자신을 객체화할 줄 안다. 무척 남다르다. 경호원의 넥타이를 순식간에 잘라내는 칼솜씨와 knife의 줄임말인 K라는 별명, 티모센코라는 교관의 이름 등으로 고도로 잘 훈련된 전직 특수전 요원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의 주변인들이 의외로 신선한 호감과 매력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외성에 있으며, 일상에 찌들어 관계성에 무감각해진 독자들은 물질과 권위를 가볍게 조롱하며 털어버리는 행운동에게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는 저자의 실제 이력으로 보건대 택배기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리라 충분히 짐작된다. 낯선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으나 웬만한 외국 스릴러 작품보다 더 흥미롭고 전개가 빠른 데다 택배 세계를 소재로 한 찰진 소설이란 점이 더욱 신선하고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세계문학상 최종심 후보작에 오른 데에는 다 그만한 저력이 있었음을 공감하며 하드보일드 소설 장르를 원하시는 독자라면 엄지 척 추천해 드린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