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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79]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읽는 만큼 재미있어지는 삶

 

한 사람의 사회생활 출발점을 스무 살이라 치고, 그가 얼추 삼십 년 동안 무엇인가 한 가지에 천착한 결과물(여기서는 책이 되겠다)을 접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일면식도 없던 사이지만 나이, 대학의 전공, 직업,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점까지 나와 많이 닮은 듯하니 없던 친근감이 생기는 것 같다면 좀 억지일까. 심지어 그의 책을 통해 SNS상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닮은 점이 좀 있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주장하기에는 좀 뜬금없다.

 

엄청난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다져진, 내가 미처 몰랐던 그만의 ‘넘사벽’ 내공까지 퉁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와는 정반대로 나는 어렸을 적 내 딸아이에게 머리맡 책 읽기를 해준 적이 다섯 손가락에도 안 꼽히고, 책은 읽었으되 고전 소설보다는 최신 정보의 대중 서적 위주였으며 읽은 책은 십 수년간 책장에 전시용으로 묵혀두었다가 이사할 때가 되어서야 급히 처분했던 적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권의 소설 가운데 겨우 <분노의 포도> 한 권을 그나마도 학부생일 때 읽어봤을 뿐이라 예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참으로 난망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 역사, 사회, 법, 종교,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문화를 읽는 즐거움도 누리게 해주며, 좋은 소설 한 권을 읽으면 뛰어난 인문 서적 여러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문 서적이라면 나 역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순간, 머릿속에 아차~!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인해 변변한 책 한 권 읽지 못하던 아내에게 이제는 책 좀 읽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듯 사 모은 책을 보란 듯이 책장에 꽂아놓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며 못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제대로 소화도 못 시킬 책을 그렇게 많이 사 모으면 무얼 하나.

 

사실 아내는 이미 10대 문학소녀 시절 수백 권의 소설책을 섭렵한데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사회경력도 앞선 은둔 고수였으니, 어눌한 영어 몇 마디 주워섬길 줄 안다고 뻐기면서도 스스로 대견해하는 감정에 쉽게 휩쓸리기 일쑤이던 나는 이순신 장군 앞의 일개 왜장에 불과한 셈이었다.

 

앞서 말한 넘사벽 수준을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저자는 때로 사소한 일로 옆지기에게 혼쭐이 나거나 특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등 마치 나의 결혼 생활을 보는 듯한 상황을 주저 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 사는 모습인가.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브로맨스를 유발하는, 유부남들의 키워드는 역시 동병상련인가 싶다.

 

문학 장르가 대개 그렇긴 하지만 소설이야말로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예술적으로 가장 잘 승화시킨 도구이다. 어느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가장 큰 화두를 이야기로 풀어냈음을 말한다. 희로애락과 같은 인간의 감정, 사상, 역사 등 전반적인 문화를 읽어내는 핵심어를 담고 있으므로 작품에 대한 이해는 곧 작가가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읽어낸다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도 고전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인간 본성과 내면에 대해 이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 아닐까.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역사의 단면을 다룬 벽돌책 도전하기’에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가 죄수들의 유형지로 선택된 것은 험지 개척을 위한 국가 시책 때문이었으며, 1930년대 농부들이 미국 서부를 향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유는 대공황 때문이며, 춘향전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 역시 오늘날의 입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과거의 유물로 남은 사무라이들이 칼을 버린 것은 시대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등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2부 ‘복잡한 인간의 내면의 소우주 이해하기’에서는 예술의 불멸하는 재료이자 가장 강력한 인간 본성인 질투, 음식, 금서, 영국의 사교계, 도박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댄디즘으로 압축되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풍미했던 무도회가 사실은 귀족들로 대표되는 상류사회의 정략적 결혼과 연계를 위한 치열한 각축장이었음을 알게 되며,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3부 ‘아는 만큼 빠져드는 일상의 인문학’에서는 신의 대리인인 동시에 악마의 상징으로 그려진 고양이, 조상은 야생동물 늑대였으나 인간에게 반려동물로 길든 개, 아내 없이는 살아도 술에는 너무나 진심이었다가 결국 요절한 작가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책 수집가들의 로망인 고서점, 종교에서 시작하여 문화가 된 요가, 본래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다이어트, 신들이 머물다 간 장소이자 고객이 곧 규칙이라는 호텔 등 일상적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작품을 소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여나 직업상 밥벌이에 도움이 될까 봐 최근 지식의 흐름과 동향을 파악한답시고 그간 심리학이나 과학, 어학, 자기 계발과 같은 실용 서적을 위주로 접해왔지만, 생각보다 책 내용은 오래도록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유토피아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일정한 이야기의 기승전결 형식을 갖춘 고전 작품의 내용과 작품이 주는 권선징악 교훈이 더 잘 생각난다.

 

비록 한 장면 한 페이지를 모두 다 떠올리지는 않지만, 우리는 단 한 번만이라도 작품을 접하게 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전체 줄거리를 어려움 없이 회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지니는 위력이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무슨 퇴직금 중간 정산도 아니고 왜 하필 저자가 말하는 나이는 오십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생 백세 시대의 중간을 맞아 이십 대에 읽었던 문학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수십 년간 나의 삶에 일어났던 일과 비교해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이 다가오는 느낌을 제대로 가져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줄거리를 감상하기 바쁘던 시절이 이십 대였다면, 인생의 진득한 체험을 통해 소설이 인생 같고 인생이 소설 같아지는 때가 오십 대이다. 스무 살 가슴 뛰는 낭만은 아니어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여생을 채비할 수 있다.

 

인생이라는 고지를 향해 넘어지고 엎어지며 정신없이 올라왔다면, 이제부터는 넘어지면 일어서기가 만만치 않으니 예전보다 더 주위를 살펴 가며 내리막을 향해 갈 때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가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자긍심과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또다시 가야 한다는 서글픔이 겹쳐온다. 이쯤 되면 소설과 현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를 나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순간이다. 하긴, 인생의 그럴싸한 모든 일이 다 소설의 소재 아니었나.

 

결국, 오십에 다시 읽는 고전 소설은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조금 늦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이제라도 읽어 볼 생각이다. 칠십 대가 되어 오십 대에 읽지 못한 걸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포씨유신문 유선종 칼럼니스트

프로필 사진
유선종

현, 서울 우신고등학교 영어과 교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학 석사
신촌 토스트마스터즈 클럽회장 역임
숙명여대 TESOL대학원 9기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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