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에 관한 책이라면 주제나 소재를 막론하고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책은 제목처럼 패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여 온 국제 ‘선수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이름이 한두 번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데 대해 살짝 섭섭한 나머지 저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일 거란 짐작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겠습니다.
이 선수들이 경쟁을 벌여온 패권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는 육지-바다-하늘-인터넷으로 형성되며 변화해온 세계사의 주 무대 형성을 주도하고 구조를 유지하며 질서의 중심축에 있는 나라를 패권 세력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육지 패권의 시대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농경민, 목축민, 상인, 기마 유목민 등 다양한 계층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페르시아와 로마 제국, 중국 전국시대 왕조,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를 거쳐 몽골제국까지 이어집니다.
이어 바다의 패권은 해상교역과 식민지 확장 위주로 450년간 군림했던 주연 영국과 조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현재에 와서는 하늘의 패권을 두고 신흥강자 미국과 전통고수 중국이 용호상박의 형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패권을 노리게 되는 강력한 동인으로 결핍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로 보고 있습니다. 패자 간의 세력이 균형 상태이거나 평화로운 시기에는 교역이란 이름으로,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약탈을 자행하여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늘렸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원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던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로마와 몽골 등 육지 패자와 영국과 같은 바다 패자는 급속한 영토확장과 장기간 식민지를 운영했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던 반면, 미국과 중국 같은 하늘 패자는 영토확장 대신 정보와 금융으로 상대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5G로 표현되는 정보혁명과 인터넷 시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저자는 예상합니다. 주 무대의 배경과 시기에 따라 세계정세의 흐름에 따라 패권을 쥐게 되는 여건도 다르고 그 양상 역시 다르게 펼쳐지지만, 이들 패권국은 세계의 ‘주도권’에 지대한 관심 혹은 집착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한이 있으면 의무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패권을 쥐었으면 패권국다운 품위를 유지해야 여타 국가들이 권위를 인정하련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언제나 이상의 반대편에서 손짓만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라는 행성의 빅브라더를 자처하는 미국의 현실을 보면 의무보다 권한에 집중하는 현상이 마치 500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모습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특히나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전염병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와 지도자의 무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단지 전염병만의 문제가 아닌 지난 150년 넘게 쌓여온 인종차별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패권 쟁탈전 선수 명단에 들지 못했다고 해서 서운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비록 최근 들어서는 혼탁한 국내 정세로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긴 하지만, 선진국으로 알고 있던 나라들보다 전염병에 슬기롭게 잘 대처하여 위상을 높인 바 있습니다. 국제정세 동향을 잘 살펴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때로 보입니다.
이 책은 공간적 개념을 주제로 한 패권 쟁탈의 세계 역사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마치 교과서를 방불케 하는 시각 자료가 풍부하여 이것들만 빠짐없이 훑어보아도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상식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 당시 처음 만났던 세계사 과목을 암기과목으로 알고 아무런 이해 공감 없이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다 할 시청각 자료도 없이 흑백 인쇄된 교과서로 오로지 선생님의 설명만 듣고 이해하려 했으니 참 아쉽지요. 당시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아마도 전공 분야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군가의 미래를 알고 싶거든 그의 과거를 돌이켜 보라 하였던가요. 이 책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전망을 도와줄 훌륭한 조력자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