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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55] 라스트 듀얼 (Last Duel)

역사상 가장 마지막, 가장 처절한 기사들의 결투 이야기

 

1386년 12월 29일, 중무장한 채 말에 올라탄 두 기사가 파리 수도원 바깥의 결투장에서 마주 보고 있다. 이들은 각자가 주장하는 명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참이다. 재판장인 찰스 6세와 다른 왕궁 신하들을 포함한 열렬한 관중들이 희대의 구경거리를 지켜보고 있다. 고소인은 장 드 카루주(Jean de Carouges)로, 대대로 저명한 노르만 가문 출신의 기사였다. 피고인은 지체는 낮아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인 자크 르그리(Jacques Le Gris)로, 카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Marguerite)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도 자체는 매우 간단해서 ‘파경으로 치닫는 두 절친의 우정’이라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다. 르그리가 뛰어난 수완으로 카루주보다 훨씬 더 빨리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재산을 불렸던 반면, 카루주는 자신의 부를 증식하려 애썼음에도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카루즈의 아내가 르그리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는다. 결국, 이들은 결투로 이어지는 모든 법적 조처를 강구하기 시작한다. 결투의 결과가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싸움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두 귀족의 결투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암시하듯 결투장 곳곳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카루주가 르그리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결투는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만일 그녀의 남편이자 챔피언(대리 대결자)이 결투에 진다면 마르그리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할 운명이었다. 사실 결투 결과와 관계없이 다수의 관중은 좀처럼 보기 드문 귀부인의 화형 장면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은 두 기사가 결투장에 마주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결투는 한때 친구였으나 불구대천의 원수로 바뀐 두 남자의 갈등과 경쟁의 정점이었다.

앞서 1303년,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결투에 의한 재판을 금지했다. 귀족들은 고대로부터의 특권이 축소되는데 매우 분개하여 1306년 왕에게 결투의 복권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결투는 충동적인 절차가 아니었기에 실행되려면 까다로운 세 가지 법적 기준을 충족해야 했으며, 파리 고등법원에서의 논의와 왕의 승인을 거치는 복잡한 절차 때문에 이후 80년 동안 이러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그런데도 1386년 카루주와 르그리의 결투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당시 국왕이자 재판장인 샤를 6세가 이러한 광경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동적 성격의 찰스는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무언가와 부딪히면 산산이 조각난다고 믿는 유리 망상증으로 간헐적 발작을 사망할 때까지 지속했다고 한다.

1385년 카루즈는 기사로의 신분 상승과 재정확보를 목표로 잉글랜드 약탈 전쟁에 참여하고자 스코틀랜드로 향했으나 작전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병들고 더 많은 빚을 진 채 노르망디로 돌아왔으나 아내 마르그리트가 옛 친구인 르그리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투는 말로 하는 재판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의 마지막 절차로, 양측은 신과 왕 앞에서 엄숙히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맹세한다. 피고와 원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 만일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다음 날로 이어져 다시 시작해야 한다.

카루주-르그리스 결투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10년 전으로 돌아가 결투와 관련된 법적 기록, 연대기, 그리고 다른 역사적 문서들을 그려낸다. 그는 또한 결투를 그 시대 맥락의 중심에 놓음과 동시에 14세기 프랑스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예컨대 수많은 전투에서 일어났으며 종종 가혹한 방법으로 악명높은 범죄와 처벌, 종교적인 믿음과 관행이 중세법 제도에 미치는 영향, 프랑스 중앙 및 지방 권력의 위계질서와 토지의 중요성,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격동적인 외교와 침략 찬탈의 역사, 왕실의 풍습과 정치적 음모 등이 좋은 사례다.

 

쟝과 마르그리트 카루주 부부 사이의 관계는 또한 봉건적 결혼제도와 이 시기 여성의 권리 또는 지위와 마땅한 권리의 부재를 보여준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으로 떠오른 마르그리트는 르그리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직접 고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내를 남편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강간죄라고 해봐야 기물파손죄 정도로 인식되었으며 같은 범죄라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큰 처벌을 받는 시대였다. 마르그리트의 고발은 그 자체로 중세 프랑스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강간죄 처벌이 입증된다면 범인에게는 죽음을, 강간범 가족에게는 불명예를 의미했다. 무고죄에 대한 처벌도 화형에 의한 사형이었다. 따라서 남편의 귀국을 기다려 피해 사실을 알려야 했고 소송 이후 결투 직전까지 무거운 몸으로 힘겨운 신체적 정신적 압박을 견뎌야만 했다. 아마도 억울한 사정에 대해 침묵하기가 훨씬 쉬었을 테지만, 그녀가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이 작품은 결투 당사자와 마르그리트 세 사람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혹자는 중세 판 미투 운동이라 일컫기도 한다.

단순한 결투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저자는 중세 생활의 여러 측면을 책 전반에 걸쳐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결투에 부여되는 모든 법적 의미를 해석하고, 강간이 어떻게 대중에게 인식되는지를 설명하며(강간 행위 중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는다면 임신하지 않는다는 생각), 똑같은 범죄인데도 여성이 남성보다 얼마나 자주 더 가혹하게 처벌받았는지를 보여준다. 14세기 말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실적인 그림을 보듯,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은 저자가 실제 조사한 역사적 자료에서 나온 수많은 인용문으로 뒷받침된다. 그 당시 문제의 결투가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사실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전체적으로 가장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를 제시해 주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만한 증거는 충분해 보이며 실제로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고증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그리의 변호사 장 르코크가 그의 개인 일기에 적은 것처럼 ‘이 사건의 진상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결투 재판의 중심에는 6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풀리지 않은 역사적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귀부인 마르그리트가 실제로 자크 르그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 미스터리 그 자체는 마르그리트의 이야기가 사건 이후 몇 세기 동안 변형되거나 거의 모두 사라진 데 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남편이 고군분투한 결투의 결과로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법률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기록되고 역사 기록에 재구성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역사가들조차도 역사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을 얼마나 쉽게 제거할 수 있는지, 또한 그러한 목소리들이 적절한 위치로 복귀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특히 중세 서양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하며, 아울러 이 사건을 바탕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며 소설과 비교해 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해 드린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참고로, 라스트 듀얼을 영화한 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오프닝 영상이다.

 

 

프로필 사진
유선종

현, 서울 우신고등학교 영어과 교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학 석사
신촌 토스트마스터즈 클럽회장 역임
숙명여대 TESOL대학원 9기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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