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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73] 초파리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70일이면 암컷 초파리 한 마리가 지구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

 

과학자들이 ‘켄과 바비’라고 이름 붙인, 생식기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도 있고 어떤 녀석들은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리를 이고 태어난다. 초파리에 관해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연구를 목적으로 이들은 인간에 의해 집단 처형(?)당하기도 하고 맛난 과일로 훈련받은 대가를 보상받기도 한다. 사람과 매우 비슷하게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일과 휴식 시간을 따로 갖는다. 마약 성분에 중독되어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걷거나(Moon Walking) 빙빙 돌다 어지럼증 아니면 배고픔으로 죽는다. 수컷의 정액에는 독성분의 단백질이 있어 암컷의 뇌 속에서 행동을 조종하며 너무 잦은 짝짓기로 일찍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외부와 단절된 하와이 제도의 초파리는 무려 1,000종이 넘는다.

 

『초파리가 실험실에 정식으로 데뷔한 때는 1900년이고, 장소는 하버드대학교 교수 윌리엄 캐슬의 실험실이었다. (중략) 박물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생물학은 동물행동학, 진화론, 생리학 등의 전문 분야로 분화해 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수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용 생물로 적합한 동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파리가 가장 적합한 후보로 입증되었다.』 (p.22-23)

 

오늘날 초파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생물학 분야는 거의 없다.

 

암 치료법을 찾는 방편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알츠하이머병과 헌팅턴병 같은 신경성 장애 연구법으로, 알코올과 약물 중독, 수면 장애, 시차증 등 유전학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100년도 넘게 초파리 연구는 유전학의 주요인으로 확립되었다.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사실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이 책은 초파리를 실험 재료로 이용해온 과학사를 다룬 매력적인 소개서이다. 벌써 20년쯤 전에 출간된 책이라 과학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는 요즘 말로 아재 개그 같지만, 다행히도 이야기의 큰 흐름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연구자로서 평생 실험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쩌다 학회에서 공짜로 보내주는 여행에 미소를 참지 못하는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초파리들만의 은밀한 성생활을 가벼운 어조의 농담으로 승화시킨다. 곤충학 관련 서적이 큰 소리로 자주 웃게 만드는 분야는 아니지만, 읽다 보면 익살스러운 표현을 자주 발견한다. 과일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알코올 성분의 효모를 섭취해 날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초파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간이 그들에게 선사하는 고통에 유감을 표하기도 한다.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여 과학에 진지한 관심을 둔 특정 독자층뿐 아니라 일반인 누구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과거 과학적 사고를 추동했던 초파리 연구의 틀을 통해 20세기 생물학적 사고가 어떻게 진화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여러 초파리 연구자들의 숨은 이야기와 함께 유전학이 진화론의 허점을 어떻게 보완해 왔는지를 소개한다. 그 결과 우리는 유전학의 탄생을 둘러싼 역사, 과학, 연구자들 사이의 대인관계 드라마에 대해 소소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배울 거리와 함께 진화와 자연철학이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초파리(small fruit fly)는 세계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파리목 초파리과로 분류된다.

 

종류에 따라 서식지가 매우 다양하고 번데기 과정을 포함한 갖춘탈바꿈을 통해 자라며 한 세대가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초파리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적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 모건 (Thomas Hunt Morgan)의 돌연변이 연구로 유명한, ‘배가 검고 이슬을 사랑하는 동물’이란 뜻의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ster는 유전학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학 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실험 재료로 취급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 활용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있으며 특히 의료계에서는 알츠하이머, 헌팅턴병, 하반신 마비, 각종 암, 소아비만 등 치료가 어려운 병을 대상으로 치료법 개발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파리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쥐나 개 · 원숭이와 같은 동물 실험은 물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과 비교해 가성비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며,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단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윤리적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초파리 연구의 선구자로 1933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토머스 모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10~191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초파리를 연구하던 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염색체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해낸다. 생물의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쌍을 이루어 염색체에 선상배열을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유전 메커니즘인 염색체지도를 초파리의 실험으로 입증했다. 그의 공로로 이전까지 방향을 잡지 못했던 유전자 연구가 튼튼한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모건 학파의 일원이었던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 역시 초파리 연구의 중요 인물이다. 그는 X선에 의한 인공 돌연변이 발생이 가능함을 최초로 입증하였으며 돌연변이 유발 효소를 결정화한 공로로 1946년 노벨생리 · 의학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출신의 생물학자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는 유전학 연구에 집중되던 초파리의 세계를 진화와 결합해 진화유전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작은 유전적 변화가 축적되어 발생하는 생식형 불일치가 종 사이의 경계를 정의한다고 보았다.

 

『도브잔스키는 두 개체군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축적되면서 몸 크기, 색깔, 생식기 구조, 행동 특이성, 그리고 그 밖의 수천 가지 특징에도 차이들이 축적되어 결국에는 두 종이 서로 짝짓기하길 싫어하거나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렇게 뚜렷이 구별되는 유전적 특징의 차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종의 기원이 발생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 (p.145)

 

사람의 유전형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초파리는 유전학은 물론 의료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실험용 동물이다. 초파리 연구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사람에게 발생하고 있는 질병들을 규명하였고, 마치 사람이 연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수컷과 암컷 사이의 애절한 구애 습성을 알아내기도 하였다.

 

초파리 유전자 연구를 통해 기대하는 분야는 불치병 치료로, 특히 헌팅턴병처럼 근육 간의 조정 능력,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정신적인 문제가 동반되는 진행성의 신경계 퇴행성 질환과 관련해 치료의 실마리가 되는 원인을 찾는 중이다. 초파리는 유전학 이외에도 종 분화 과정과 같은 진화 연구, 행동과 생태에 관한 연구, 생리학, 세포 생물학과 발생에 관한 연구 등 생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적절한 실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초파리는 심리학 연구에도 동원되고 있다. 초파리를 대상으로 유전자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는지, 시간과 공간 감각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 등 행동 유전학에 활용되고 있다.

 

초파리는 몸집이 작고 다양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기 때문에, 좁은 장소에서 간단한 먹이로 많은 개체를 쉽게 기를 수 있다. 또한 돌연변이를 식별하는 방법이나 사육하는 기술이 어렵지 않다. 초파리 애벌레의 침샘에 있는 다사염색체(polytene chromosome)는 핵분열 없이 염색체가 반복적으로 복제되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유전자의 관찰이 쉽고 유전자의 작용을 연구하기에 적당하다. 유전학 연구에 있어서 교배를 통한 실험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한 세대가 짧고 번식을 많이 하는 초파리는 좋은 연구재료가 되고 있다. 생쥐나 예쁜꼬마선충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만능 실험 동물로 남아있는 초파리를 통해 또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지켜볼 일이다.

 

『신체가 맡은 주 임무는 생식을 할 때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개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생식에 성공하고 나면 체세포는 돌연변이가 누적되고 늙어 갈 수 있다. 맡은 임무를 이미 완수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화는 우리가 유성 생식을 하도록 만듦으로써 우리의 신체를 소모품으로 만든 것이다.』 (p.253)

 

결국, 이 놀라운 초파리는 과학 발전사에 큰 공을 세운 숨은 영웅이었다. 그런데도 금세기의 많은 위대한 발견물 가운데 초파리의 선구적인 역할에 대한 대중적 설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유전학에서 진화학, 생리학에서 생태학,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초파리의 짧고 굵은 삶을 통해 현대 생물학사를 들려줌으로써 부패한 음식물을 좋아하는 조그맣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로잡아준다. 저자는 매우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화법으로 초파리의 생애 주기를 단계별로 알려주며 생물학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의를 찾는다. 배아에서 성체에 이르는 놀라운 여정부터 기억과 학습의 본질 그리고 노화의 이론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짧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이 인간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초파리 연구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초파리의 명성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포씨유신문 유선종 칼럼니스트 |

프로필 사진
유선종

현, 서울 우신고등학교 영어과 교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학 석사
신촌 토스트마스터즈 클럽회장 역임
숙명여대 TESOL대학원 9기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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