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도모하다.
지금보다 더 세상 물정에 어수룩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 제법 규모와 형식을 갖춘 직장인 영어공부 모임에서 결혼제도를 주제로 토론을 하게 되었다. 만만치 않은 영어 구사력과 탄탄한 논거로 어쭙잖은 상대는 당차게 물리치는 모습의 한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던 중, 기회를 보아 차 한잔의 대화를 제안했더니 흔쾌히 수락한다.
결혼이란 개인의 선택이기는 하나 두 집안 간의 새로운 만남이니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필자의 의견과는 달리, 이 동년배 여성의 발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네 가게에서 생필품을 사더라도 유통기한 제조원 영양성분표를 따져보기 마련인데 하물며 그토록 중차대한 인륜지대사를 결정하려면 상대와 동거 기간을 가져보고 난 후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이 당찬 여대 졸업생의 주장을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어물쩍 긍정으로 넘어가고 말았지만, 아무리 동시대를 살더라도 외형적 매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시대를 앞서가던 그의 생각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자신을 발견하였다. 20년도 더 지난 오늘날이야 동거 후 결혼이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추세이지만 당시 필자의 생각은 반복 학습의 결과로 대가족을 우선하는 아버지 세대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가족 제도의 급격한 세태 변화에 둔감하였다는 얘기다.
최근 우리나라는 가정의 결성부터 구성원의 재생산 및 생을 마감하는 단계, 즉 사회 통념상의 순서와 과정이 포함된 생애 주기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 사회구조이자 바람막이로 인식되던 ‘4인 1가구’ 가족 형태가 흔들리면서 행복의 원천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짧은 기간 내에 재정의되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각자도생 출현의 바탕에는 저성장 기조의 사회 분업구조와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 합리적이고 진지한 선택이라는 인식 변화가 한 몫 거들고 있으며, 이는 다양한 형태로 활발한 가족 재구성을 유도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일례로 혼밥, 혼술, 혼영 등의 용어들은 점점 단세포 화하는 1인 가구 세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본인다운’ 자아를 찾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적극적인 인생 실험으로 해석된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한 사람의 위기가 전체의 위기가 되는 사회구조 취약성의 배경 설명을 시작으로(1부) 세대 불문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개인화 추세를 들여다보고(2부) 결혼이란 이름의 가족 구성 제도의 급격한 변화상을 말하며(3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가족 제도의 발전적 해체와 재구성 사례들을 살펴보고 있다(4부).
저자는 ‘해외의 각자도생 공존법’ 사례들을 제시하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가족 제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책의 분량은 적은 편이지만 다양한 인구 통계와 날카로운 세대 분석으로 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한, 사회학자답게 저명한 학자들과 이론들을 쉽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한편 저자는 각자도생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연령대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청년층 (10~39세, 36.4%)
대부분 부모보다 가난해질 미래가 사실상 확정된 최초 세대이다. 돈벌이조차 힘든 현실이므로 졸업-연애-결혼-출산-양육의 표준적인 삶의 경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으며 효도는 본인의 형편이 나아지는 훗날로 연기한다. 부모 세대에 추구하던 산업화 민주화도 끝났으므로 후속 세대인 청년을 설명하는 건 다양화뿐이다.
2. 중년층 (40~69세, 44%)
고용, 가족, 심리, 질환, 사업의 다섯 가지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아무리 평범한 중년이라도 한두 가지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데 한 가지라도 걸리면 나머지로의 전염은 시간문제다. 자녀 양육과 부모 공양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다. 늦은 출산으로 50대에도 사교육비에 휘청이고 독립이 늦는 자녀의 생활비 지원과 부모의 간병 문제를 피할 수 없다.
3. 노년층 (70세~ , 10.5%)
인생 100세 시대를 맞아 유투버 박막례 여사, 시니어 모델 김칠두, 할담비로 불리는 춤꾼 지병수 등의 사례처럼 늙음에 맞서 스스로 인재임을 증명하고 생산성을 증빙함으로써 ‘노년=도전’의 새로운 신노년층 등식을 완성하는 추세이다.
이와 같은 사회의 흐름은 각자가 행복을 추구하고픈 본능에 충실한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주의가 앞서 발달한 해외 국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가장 급진적으로 개인화된 국가라는 평을 듣는 오늘날, 나와 가족의 행복이 보장되어야 사회 전반이 고루 안정적일 수 있다는 저자의 역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행복 실험은 건강한 동시에 적극적이며 확장적임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행복의 추구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의 답을 사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제도를 정비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려면 경쟁 위주보다 다양성 인정을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성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앞으로 ‘각자’가 ‘도생’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실험이 더욱 퍼져나가리라 예측하는 한편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커지기를 열렬히 소망하고 있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